한국을 다녀오면 항상 가져오는 물건들 중에 한 가지를 뽑으라면 고추가루다. 어머님이 젊으셨을 때는 항상 우리 고춧가루를 매년 가을에 챙겨 주셨다. 식구들이 먹으려고 따로 고추 농사를 지어 집에서 손수 말린 후에 방앗간에서 빻아 만든 순 한국산 고춧가루다. 형제 많은 친가에 다들 나누어 주고 미국에 사는 우리를 위해 다른 것은 몰라도 고춧가루만큼은 꼭 쟁여 놓으셨다.
이제는 언니가 최고급 산 고추가루를 한 상자씩 매년 보내주신다. 평생 회사를 운영하시던 오빠도 은퇴하셔서 고추 농사를 조금 소일거리로 해 보시다가 우리까지 챙겨 주시고 있다. 너무 감사하게 1년 내내 우린 깨끗하고 맛있는 고추가루로 김치를 미국 집에서 담글 수 있다.
한국에선 아직도 매년 초겨울에 김장을 담근다는데, 1년 내내 마트에서 쉽게 맛있게 만들어진 김치를 구입할 수 있어 양은 많이 줄어든 것 같다. 그래도 시댁에 가면 김치냉장고에 묵은 김치와 김장 포기김치가 항상 가득하다. 보기만 해도 너무 흐뭇한 모습이다.
땅이 얼기 전에 김장을 해서 뒷뜰에 묻어 놓고 다음 배추가 나올 때까지 김장김치로 겨울을 나는 것이다. 연희동 기찻길 옆 뒷마당은 엄마의 텃밭과 함께 김장독이 줄을 서 있었다. 어려서는 김장 담그는 날이면 이모들과 사촌 언니들까지 오셔서 큰 손님을 치르는 날이기도 했다. 전날 엄마는 마당의 큰 통에 배추를 씻고 소금에 절인 뒤, 아침에 소쿠리에 건져 놓으신다. 한 편에는 큰 솥에 배추된장국을 끓일 준비를 해 둔다. 김장할 배추의 겉잎만으로도 충분하고, 멸치육수는 미리 만들어 놓으시고 고기는 김장하는 날에 삶아낸다.
막내인 내겐 신나는 날 학교 끝나자마자 돌아와 잔칫구경하듯이 옆에 앉아 배춧잎 속에 무 무친 속양념을 싸서 주시면 좋다고 받아먹었다. 김장 속에 들어갈 무채 양념은 김장하는 날이 아니면 맛볼 수 없는 고유의 귀한 맛이라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이상하게도 평소에 담그는 김치와는 다른 맛이었다. 모든 젓갈류도 엄마의 단골집에서 직접 주문해서 사 온 것들로 세 가지 종류의 젓갈을 섞어 배합한 것에 각종 야채들도 종류가 다양하게 들어간다. 아마도 그래서 그런 것 같다. 미국에서는 흉내 낼 엄두도 못 내는 그런 맛이다.
엄마는 김장김치 외에도 밤, 문어, 굴, 잣, 미나리, 갓 등을 넣은 보쌈김치도 한 항아리에 담가 나누어 먹곤 하셨다. 그 맛은 처음엔 강하게 느껴졌지만 해가 갈수록 기다려지는 맛 중의 하나였다. 제법 비싸고 귀한 재료들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젓갈도 여러 가지가 들어간다.
엄마의 손맛이 바로 김장김치의 맛이었다. 한국을 떠난 1991년부터 계속 그리웠던 김치맛은 엄마의 손맛이었다. 가끔 비비고 포기김치나 총각김치를 맛볼 때, 묵은 김치의 맛을 잠시 느낄 때 다시 그리워지는 맛이다. 여러 가지 재료들을 구해 만들어도 정말 쫓아갈 수 없는 맛은 마음속 깊이 새겨진 맛이라 그런 것 같다. 나의 머릿속 어딘가에 자리 잡은 그 맛은 지워질 수도 없는 맛이다.
직장을 구해 독립한 딸 집에 갈 때는 그래도 손수 담근 김치 한 통 꼭 들고 간다. 내가 오래 기억하던 그 맛은 아니지만 마트에서 사 먹게 하고 싶지 않아서다. 김치만큼은 만들어서 먹을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 요즘엔 미국에서 웬만한 재료는 쉽게 구할 수 있다. H Mart가 들어온 이후 아시안 마켓에 가지 않고도 배추와 무를 쉽게 살 수 있다. 너무 좋은 세상이다.
김치 담그는 방법을 우리 딸들이 읽기 쉽게 써 보려고 한다. 아마 김치의 고수들이 보면 어설프게 보이겠지만 미국에 사는 엄마의 일상의 모습 그대로 적어본다.
김장김치 재료 (배추 4포기 기준, 미국에서 구하기 쉬운 재료로)
절임용: 배추 4포기 (Napa cabbage, H Mart나 일반 마트 생산 코너에서 구입 가능), 굵은소금 2컵 (천일염이 가장 좋지만 없으면 kosher salt로 대체 가능, 굵은 소금은 항상 쟁여놓고 쓴다)
무채 양념용
야채: 무 2개 (daikon radish), 파 (대파 5대, 쪽파 1단), 양파 1개, 사과 또는 배 1개, 미나리 1단
무채 양념: 마늘 다진 것 1컵, 생강 다진 것 2큰술, 고춧가루 2~3컵 (한국에서 가져온 게 없으면 한국산 확인하고 H Mart나 아마존에서 구입 가능), 새우젓 1/2컵, 멸치액젓 또는 까나리액젓 1컵 (아시안 마켓 필수 재료; 없으면 피시소스로 대체 가능하나 맛이 확연히 달라짐, 항상 2가지의 젓갈을 넣는다), 찹쌀풀 1컵 (찹쌀가루 또는 rice flour로 대체 가능), 설탕 2큰술 (배추량에 따라 다르지만, 가능하면 설탕은 1큰술만 쓰고 나머지 단맛은 양파와 배즙으로 대신한다. 나는 설탕 대용으로 선인장꿀가루를 즐겨 쓴다.)
이제 재료도 다 준비되었으니 담가 볼 차례다. 완벽하게 엄마의 손맛을 재현할 수는 없어도, 나만의 손맛과 정성이 담긴 포기김치를 만들면 되는 거다.
배추 절이기: 배추 4포기를 반으로 갈라 굵은소금을 켜켜이 뿌려가며 절인다. 실온에서 6~8시간, 중간에 한 번 뒤집어준다. 엄마는 마당 큰 통에 배추를 씻고 절이셨는데, 나는 부엌 싱크대 반쪽짜리에서 겨우 흉내를 낸다. 배추 절이는 게 사실 제일 까다로운 부분인데, 소금물을 맛봤을 때 짭짤한 정도로 만들어 배추를 하루 담가두면 훨씬 골고루 절여지고 간간이 체크하기도 쉽다. 그래도 배추 밑동이 부드럽게 휘어지면 다 절여진 것이니, 그 순간만큼은 엄마의 손길과 똑같은 확인법이다.
찹쌀풀 만들기: 물 2컵에 찹쌀가루 2큰술을 풀어 끓여 죽처럼 만든 뒤 식힌다. 예전엔 일본 찹쌀가루인 모찌코를 많이 썼는데, 요즘은 H Mart에 가면 찹쌀가루를 쉽게 구할 수 있다. 엄마는 이 찹쌀풀 하나에도 정성을 들이셨다. 나는 rice flour로 대충 대체하지만, 그래도 이 하얀 풀이 걸쭉해지는 걸 보면 왠지 마음이 놓인다.
무채 썰기: 무는 채 썰고, 파와 미나리는 3~4cm 길이로 썬다. 양파와 사과(배)는 강판에 갈거나 믹서에 간다. 채칼로 손을 다치기 쉬우니, 저렴한 채칼용 블렌더 하나 사서 쓰면 훨씬 안전하다. 좀 두껍게 썰어도 괜찮다. 미나리를 씻으며 문득, 어릴 적 배춧잎 속에 무채 양념을 싸서 받아먹던 그 맛이 떠오른다. 평소 김치와는 다른, 김장하는 날에만 맛볼 수 있던 그 귀한 맛 말이다.
양념 배합: 찹쌀풀에 고춧가루를 먼저 풀어 불려준 뒤, 마늘, 생강, 새우젓, 멸치액젓, 설탕을 넣고 골고루 섞는다. 따뜻한 찹쌀풀에 고춧가루를 먼저 버무리면 매운맛이 더 살아난다고 할머니는 늘 말씀하시곤 했다. 언니가 보내 준 고춧가루를 풀 때마다 마음 한켠이 따뜻해진다. 이 고춧가루가 있어서 그나마 한국 맛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걸 안다. 최고의 선물을 받은 느낌이다.
속 버무리기: 채소들을 양념에 넣고 버무려 무채 속을 만든다. 한 젓가락 집어 맛을 본다 — 이게 바로 그 “김장하는 날에만 맛볼 수 있는” 맛이다. 완벽히 그 맛은 아니지만, 어렴풋이 닮은 구석이 있다. 마음속에 새겨진 그 맛에는 못 미쳐도, 이 정도면 충분히 반갑다.
배추에 속 넣기: 절인 배추를 헹궈 물기를 뺀 뒤, 잎 사이사이에 무채 속을 고르게 채워 넣는다. 손끝에 양념이 물들 때마다, 엄마의 손도 이렇게 붉게 물들었겠구나 싶다. 이 모든 걸 혼자 하다 보면 버무릴 때쯤 허리도 좀 아프지만, 속 한 번 싸서 먹어 보면 그 피곤을 잊게 된다.
숙성: 통에 담아 하루는 실온에 두었다가 냉장고로 옮겨 최소 1주일 숙성시킨다. 시댁 김치냉장고처럼 가득 채워 놓을 순 없어도, 우리 집 냉장고 한켠에도 작은 김장의 흔적이 자리 잡는다. 이 뿌듯함은 오래 간다.
동네 친구 전주댁이 만든 김치를 맛보면 왜 그리 독특하고 맛있는지 모른다. 나는 서울 김치의 깔끔한 맛을 좋아해서 다른 여러 가지 재료를 넣지 않고 기본에 충실한 맛으로 만든다. 서울 토박이로 자란 탓이다. 어려서부터 먹고 자란 입맛이 무섭다고 하는 말이 이해가 간다. 한 통은 2시간 거리의 도시에 사는 딸에게, 나머지는 우리의 저녁 밥상에 오를 기본찬으로 냉장고가 뿌듯한 하루가 된다.
김치는 이제 한국 직송으로 미국에서도 구할 수 있어서 정말 한국적인 맛이 그리울 때면 조금 비싸더라도 울타리, 한품 등에서 구입하기도 한다. 그 값을 충분히 할 만큼 맛이 있고 미국 생활에서 김치를 많이 먹지는 않기 때문에 사 먹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래도 담가 먹는 것은 한국의 고춧가루 때문이다. 깔끔하고 상큼하고 달기까지 한 고춧가루의 맛이 담긴 손김치는 따라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완벽하진 않지만, 딸의 집에 들고 갈 김치 한 통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마트에서 사 먹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손수 만든 걸 건네고 싶은 마음. 그게 아마 엄마가 내게 물려주신 것 중 가장 오래 가는 것이 아닐까.
때로는 겉절이를 샐러드처럼 담가 먹기도 하고, 제일 담기 쉬운 깍두기로 국밥을 위해 담가 보기도 한다. 다음에 한 번 소개해 보려고 한다.
딸에게 들려주고 싶은 김장 이야기
한국을 다녀오면 항상 가져오는 물건들 중에 한 가지를 뽑으라면 고추가루다. 어머님이 젊으셨을 때는 항상 우리 고춧가루를 매년 가을에 챙겨 주셨다. 식구들이 먹으려고 따로 고추 농사를 지어 집에서 손수 말린 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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